제천의 역사와 전통을 알아 볼 수 있는 게시판 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제천의 지명과 행정구역의 변화 지역적 특성과 산물 등을 알려드립니다.
작성일 : 24-07-23 16:44
[조선왕조실록] 제천 의림지의 인문지리학(1)
글쓴이 :
문화원
(조회 : 1,708)
1.연구사의 추이와 현황
본서는 약 2000여 년에 달하는 유구한 역사를 향유해 온 고대의 대표적인 관개. 수리 시설로, 현존하는 유일한 제언에 해당하는 제천 의림지를 대상으로 한 종합적인 연구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에 4부 7장 체재로 기획된 본 연구서의 내용을 개진하기에 앞서, 1956년부터 2022년 12월 현재 시점에 이르기까지, 이 천해의 역사적 공간을 대상으로 진행되어 온 연구사적 추이와 현황을 우선적으로 분석. 평론하는 논의의 장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 같은 선행 조치는 지금까지 진척된 의림지에 대한 연구사적 흐름과 성과들을 정리하고 집게한 사례가 없었다는 자각에 따른 지적 반향임과 동시에, 또한 본서가 채택한 문헌 연구/인문지리학적 연구 방법론과 내용상의 구성체계에 대한 우선적인 이해를 도모하기 위한 저자의 의도를 반영해 주고 있다.
1) 일제 강점기~1970년대
일단, 이번의 논의에서 참조한 제반 자료들의 목록 소재처는 국립중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 그리고 네이버(naver)의 학술정보와 한국학술지인용색인(KCI)등임을 밝혀 둔다. 그러나 논의 과정에서 번거롭게 일일이 출처를 표기하지는 않기를 한다. 또한 학적 담론의 형식을 취한 공식적인 논문류의 글이 아닌, 곧 잡지나 여타 기사류 따위의 글들은 모두 제외시켰다.다, 이하의내용에서 확인되듯이, 특별한 기록적 가치를 지닌 몇몇 기사/잡지류의 글에 한해서는 예외를 두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이제 의림지를 대상으로 한 기존의 연구 성과를 가운데서, 일제강점기에서 1970년대에 이르는 기간에 작성된 글들을 우선적으로 소개함과 동시에, 또한 이 같은 선행 연구 성과들이 파생한 연구사적 영향력의 문제를 아울러 분석해 보도록 하겠다. 국내에서 의림지에 관한 내용을 최초로 다룬 언론은 일제 강점기 때의 "조선신문사"로 <의림지 소제호>라는 표제를 취했다. 5년 뒤에는 역시 일본어로 쓰인"부산 일보사"ㅇ서 <제천 명소 의림지>라는 사진이 제목과 함께, 6면의 5단을 장식하도록 편집되었다. 뒤이은 1932년에는 "매일신문사"에서 <의림지의 풍광>이라는 제하의 기사를 싣기도 하였다. 암울한 일제 강점기임에도 일정한 주기별로 의림지를 소개했을 정도로 대단한 존재감이 감지되지만, 학술적 내용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내용에 그쳤다. 대신에 "조선신문사"의 기사는 의림지를 비교의 관점에서 다룬 의의가 있다. 실제 의림지 연구는 김제의 벽골제나 상주의 공검지/밀양 수산제등과 같은 고대의 수리시설들과 함께 비교의 시각에서 다뤄지는 경우가 많다. 또한 "부산일보사"와 "매일신보사"의 기사는 의림지를 '명구/영구/절경'이라거나, 혹은 "경치 좋은 구역/신령한 곳"이라는 찬사로 평하곤 했던 전래의 전통과 맥을 같이 하고 있음이간취된다. 한편 3.1 운동이 도도하게 물결쳤던 1919년에는 "의림지수리조합성립"에 수록된 이 책자는, 바햐흐로 일제가 조선에 대한 농업수탈정책이 가시화되는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시사해 준다. 이에 "동아일보"에서는 의림지수리조합을 다룬 기사를 보도했고, 전 조선의 수리조합의 실황을 답사한 기록을 게재하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동아일보"는 1930년대에 여러 번에 걸쳐 의림지에 관한 기사를 보도하기도 했으나, 일일이 다 소개하지는 않겠다. 또한 이 무렵인 1934년에 "시험지 충청북도제천군제천면의림지리"라는 보고서가 조선총독부 농사시험장 남선지장에서 발간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의림지가 설의 이름으로 학계에 전격적으로 소환된 계기는 해방정국을 거친 이후인 1950년대의 일이었다. 1956년에 이르러 원로 역사학자였던 두계 이병도는 자신의 수필집인 "두계잡필"에 수록된 "한국 수전의 기원"이라는 글을 통해서 이른바 의림지 삼한시대 시축설을 제창했고, 그 결과 잏 학설은 의림지 연구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쟁점으로 부상하게 된다. 3년 뒤에 이병도는 그동안의연구 성과들을 정리/편집한 "한국사/고대편"을 빌려서 기존의 삼한 시축설을 재차 주장하게 된다. 그리하여 근대 사학의 수립에 기여한 이병도의 학문적 권위로 인해, 의림지는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 삼한시대를 대표하는 농경문화 유적지로 사진과 함께 수록됨으로써, 마침내 대내외적으로 부동의 정설로 공인되기에 이른다. 다만, 지질/고고학적 차원에서의명증한 실증적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했던 까닭에, 이병도의 학설은 1997년 12월에 개정된 제 7차 교육과정에 의거한 "국사" 교과서에서 누락되는 사태에 직면하게 된다. 이와 동시에 기존 이병도 학설에 내재된 문제점에 대한 비판적인 논문들이 줄지어 제출되기에 이르렀고, 결과적으로 이는 의림지 시축 담론의 활성화라는 새로운 논의의 국면으로 인도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병도가 제창한 삼한시대 시축설은 의림지 연구사에서 가장 중요한 지적 계기를 제공해 준 기념비적 사건으로 남게 되었을뿐더러, 그 설이 추수한 업적과 한계의 너머에서 의림지 연구를 추동케 한 강력한 동인을 제공해 주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그런데 이병도가 "남방행렬 제사회 삼한"을 집필한 1959년 이후로는 의림지를 대상으로 한 연구 성과가 상당한 기간에 걸쳐 중단되는 사태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다가 그로부터 13년이 흐른 뒤에 임학계의 정인구에 의해 연구사적 맥이 다시 부활하는 계기를 맞이하게 된다. 정인구는 "의림지 축제에 관한 일고찰"이라는 제하의 논문을 통해서, 고대축조기술의일단인제방의 구조/형태와 축제기술을최초로 규명한 실증적인 연구조사를 발표하였다. 이논문은 동년 8얼 19일에 발생한 미증유의 대홍수로 인해 의림지 제방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 직후에, 직접 현장을 답사하고 작성한 열정의 산물이다. 당시 정인구는 제방의 주성분이 화강암 풍화토인 사양토라는 사실과 함께, 큰 나무를 가로로 묻었거나, 제방 하단에 적용된 부엽층의 존재를 확인하는 등의 새로운 조사 결과를 제출하였다. 더욱 주목되는 점은 정인구의 연구 조사는 그로부터 약 4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이후에 이뤄진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의 '최초의 부분 절개조사'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는 정인구가 제시한 <의림지 축제 제방내부단면도>를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가 수정한 후에 재편집해서 발간한 "제천 의림지 시/발굴조사보고서에 <그림 8: 의림지 제방 단면도>를 전시한 장면을 통해서도 분명하게 확인된다. 또한 정인구는 적기한 논문을 빌려서 의림지 제방이 최초로 죽조될 당시의 수종이며 특징적인 임상도 아우러 밝혀두기도 했다. 이 대목은 의림지 제림의 연구와 관련된 최초의 언급일 뿐만 아니라, 2000년대 이후에 고생물학/자연지리학 분야의 연구자들에 의해 규명되기 시작한 의림지와 그 주변의 식생 생태계 연구에 대한 강한 지적 자극을 파장하기도 했다는 두 가지 측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연구사적 의의가 확인된다. 이 같은 선행 성과들을 반영해서 최근에 재림의 역사적 기원과 함께, 전근대 시기에서의 의림지의 임상을 종합적으로 규명한 연구가 제출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정인구가 수행한 연구는 고고/지질학적 차원에서의 실증적 근거가 결여된 이병도 학설에 대한 안티테제의 의미를 겸하고 있었기에, 2000년도 이후에 왕성하게 전개된 자연과학 분야의 연구자들에도 유의미한 선례를 선사했던 것으로도 평가된다. 한편 2년 뒤에 김장수는 "의림지" 축제기술과 퇴적물질석해에 관한연구"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 역시 1972년에 발생한 대홍수 시에 현장을 답사한 뒤에 작성된 것으로, 제방의 구조/형태 및 축조기술과 함께 "의림지에 1400연간 퇴적된 물질을 분석한"것으로 파악되었다. 비록 이 글이 인용된 사례는 없으나, 제방의 축조를 뜻하는 '축제'라는 키워드가 연속되고 있을뿐더러, 퇴적물질의 분석을 시도하였기에 정인구의 그것과 유사한 문제의식이 발휘된 성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이병도와 정인구/김장수 3인의 연구는 향후 의림지 연구가 시축 담론을 핵심적인 쟁점으로 설정하게끔 추동케 한 논의의 방향을 예시한 연구사적인 의미와 더불어, 또한 이 주제 사안이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이 상호 성과를 공유하면서도 연구를 진행하는 이른바 학제적 접근을 시도할 때 최상의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는 여운을 남겼던 것으로도 평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병도에 뒤이은 정인구/김장수의 연구 조사 이후로는 의림지 연구는 상당히 기나긴 공백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사태는 1976년 12월에 의림지가 충청북도 기념물 제11호로 지정된 이후에도 그대로 지속되었다. 이 같은 현상은 2006년에 의림지가 문화재청에 의해 전격적으로 명승으로 재지정되자, 이와 유관한 유인표 외의 연구가 즉각 제출되었던 정황과는 매우 대조적인 것이다. 물론 1980~1990년 연간에도 의림지 연구가 활기를 띠었던 것은 아니며, 최소한의 연구사적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