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의 역사와 전통을 알아 볼 수 있는 게시판 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제천의 지명과 행정구역의 변화 지역적 특성과 산물 등을 알려드립니다.
작성일 : 22-07-26 15:32
[백운면] 평동리[平洞里]
글쓴이 :
문화원
(조회 : 1,642)
평동리는 본래 제천군 원서면 지역으로서, 평지가 되므로 ‘평동리’라 하였다 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창리(倉吏), 갈산리(葛山里)를 병합하여 백운면에 편입되었다가, 1980년 4월 1일 제천시 승격에 따라 제원군 백운면 평동리가 되었다. 1995년 1월 1일 시군 통합에 따라 제원군 백운면 평동리가 되었다.
백운면 소재지로 경찰파출소, 백운초등학교, 백충중학교, 백운우체국, 백운농업협동조합 등의 공공기관이 위치해 있다. 조선 고종(高宗) 33년(1896) 정월 4일에 의병대장 유인석(柳麟錫)이 충주에 있는 왜적을 치기 위하여 이곳에 진을 치고 있다가 충주고 갔었다고 한다.
평동리는 행정구역상 1리와 2리로 구분되어 있다. 평동1리는 백운면의 소재지 마을로, 5일장(매1, 6일)이 시던 마을이다. 마을면적은 149.2ha이며, 논은 20ha, 밭은 41ha이다. 인구수는 444명, 가구수는 187가구이다. 특산물은 고추 등이다. 평동2리는 박달재와 2백년 이상 된 소나무들이 자리 잡고 있는 박달재자연휴양림 등이 위치해 있다. 마을면적은 871.6ha이며, 논은 29ha, 밭은 72.3ha이다. 인구수는 302명, 가구수는 131가구이다. 특산물은 고추, 사과, 벼 등이다.
◎ 평동리 지명유래
● 갈미¹[갈산] : 갈미 아래 있는 마을.
● 갈미²[갈산] : 평동 서북쪽에 있는 산. 봉우리가 갈모처럼 생김.
● 갈산¹(葛山) → 갈미.
● 갈산²(葛山) → 갈미.
● 내평장곡(內平章谷) → 안말.
● 도덕사(道德寺) : 소리개 동북쪽에 있는 절. 1958년 3월에 진우가 세움.
● 도덕암(道德岩)[도적암] : 박달재 서쪽 아래 개울가에 있는 큰 바위. 바위뒤에 도둑들이 웅거하며 박달재를 넘어 다니는 행인들을 괴롭혔다 함. 밑에는 내가 흐르고 뒤에는 기암절벽이 솟아 있으며, 수목이 울창하여 경치가 아름다움.
● 도적암 → 도덕암.
● 둔지원터(屯地院-) : 창터에 있는 조선 시대의 둔지원의 터. 연산군(燕山君) 8년(1502)에 제천 현감 임호(任浩)가 창건하였는데, 그 뒤 원서창(遠西倉)으로 쓰이다가 헐림.
● 둔지천(屯地川) : 원서천(遠西川), 창천(滄川)이라고도 부름.
둔지천(屯地川)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에 “현 서쪽 43리에 있다. 가질문산(加叱文山)에서 나와서 남쪽으로 흘러 청풍군 북진으로 들어간다.”, 『여지도서』 에는 “현에서 서쪽으로 43리에 있다. 갈문산(渴文山)에서 나와서 남쪽으로 청풍의 북진 하류로 흘러 들어간다.” 라고 하였다. 『제천현지』 에는 “현에서 서쪽으로 45리에 있다. 한 갈래는 갈문산(渴文山)에서 나고, 한줄기는 구륵산에서 나와서 합류한다. 남쪽으로 둔지원(屯地院)을 지나 대치에서 주포와 사계가 합류하여 청풍 북진 하류에 있는 황강(黃江)의 서쪽으로 흘러들어간다.”라고 기록하였다.
● 둔지천교(屯地川喬) → 원섯다리.
● 박달령(朴達嶺) → 박달재.
● 박달재[박달령] : 봉양면 원박리로 가는 고개 ‘박달재’라고 함.
● 박달재터널 : 봉양면 원박리와 통하는 국도 48번 도로상의 터널로 길이 1.965m의 왕복 쌍터널.
● 박달재휴양림 : 도덕암 주변에 조성한 자연휴양림. 통나무집 황토방 등의 숙박시설이 갖추어져 있음.
● 백운오순절교회 : 평동리226번지에 위치
● 본말 : 평동리의 본 마을.
● 소리개[연리] : 안평창골 동북쪽 높은 지대에 있는 마을.
● 순국경찰관 묘역 : 1950년 백운지구 전투에서 전사한 무연고 순국경찰관 묘역으로 1996년 제천 신백동에서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 안말[안평장골, 내편장곡, 장자터] : 평장골 안쪽에 있는 마을. 충주박씨(忠州朴氏) 부자가 살았다 함.
● 안평장골 → 안말.
● 연리(鳶里) → 소리개.
● 왕국회관 : 평동리 594-3번지에 위치 신도 수 약 30명 정도 됨.
● 원서뒷들[원서후평] : 평동 남쪽에 있는 들. 원서창 터 뒤가 됨.
● 원서면 터(遠西面-) : 본말에 있는 원서면의 터. 본래 제천군 서쪽 멀리 있으므로 원서면이라 하여 대티(大歭), 알연(戛然), 장금대(長琴垈), 질고개(桎苦介), 왕당(旺堂), 주론(酒論), 창리(倉里), 갈산(葛山), 부수동(副壽洞), 방학교(放鶴橋), 우음곡(遇音谷), 우경(遇慶), 화산(花山), 한삼포(漢三浦), 공자(空梓), 화당(花堂), 죽관(竹串), 덕동(德洞), 굴파(窟坡), 용산(龍山), 차도(釵道)의 21개 리를 관할하다가, 그 뒤 서면(西面)으로 개칭하였으며, 1914년 군면 폐합떄 제천군 백운면으로 고쳤다가, 1980년 제천시 시승격으로 제원군 백운면으로 되었다가, 1995년 1월 1일 시군 통합에 따라 제천시 백운면 평동리가 되었음.
● 원서창 터(遠西倉-) → 창터.
● 원서후평(遠西後坪) → 원서뒷들.
● 원섯다리[둔지천교] : 평동 복판 둔지천 위에 놓인 다리, 원월리(院月里)와 평동(平洞)을 잇는 다리.
● 중총말 : 평동 복판에 있는 마을.
● 평동교(平洞橋) : 평동에 있는 다리. 길이14m, 너비3m. 1962년 12월에 놓았다가 다시 고쳐놓음.
● 평동장(平洞場) : 평동에서 열리는 5일장. 1일과 6일에 서다가 1980년 이후 폐지됨.
● 평장곡[平章谷] → 평장골.
● 평장골[평장곡] : 평동 동북쪽에 있는 마을. 평장사(平章事) 벼슬을 한 사람이 살았었다 함.
● 창말 : 창터 근처에 있는 마을.
● 창터[원서창터] : 평동 위 백운면 사무소 근방에 있는 터. 옛 제천군 원서면에 딸린 창집이 있었음.
● 천주교백운성당 : 평동리 277-2에 위치.
◎평동리 문화유산
● 갈미마을 고인돌
백운면 소재지 앞으로 원서천이 흐르는데, 이 원서천을 따라서 700m 정도 상류로 올라가면 ‘홈바위’와 ‘자라바위’가 있어 사람들의 여름철 놀이터로서 이름난 곳이 있다. 홈바위 앞에 조그마한 마을이 있는데 바로 갈미 마을이다. 오른쪽으로 갈미마을 들어가는 작은 길을 따라서 20m 정도 가면 고인돌이 위치하고 있다. 고인돌 뒤에는 이신숙 장로의 묘가 있고, 묘를 쓰기 위하여 고인돌의 일부에 축대를 쌓아 시멘트를 발라 전체의 모습을 알 수 없다. 다만 현재 드러난 부분에 크기 10X10X5cm의 구멍이 하나 남아 있다. 또한 자세히 살펴보면 돼지의 형상 같기도 하고, 또는 어떤 동물의 머리를 표현하기 위하여 손질을 한 흔적이 보이기도 한다. 고인돌의 방향이 원서천의 흐름과 나란하여 청동기 시대의 물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의식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고인돌 주변의 야산은 현재 대부분의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고, 사람들이 생활하기에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어 주변에 대한 정밀한 조사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 경은사(慶恩寺)
조선중기 탄명(坦明)선사가 창건 ‘도덕암’ 또는 ‘백운암’으로 불리었고 빈터로 전해오던 것을 1939년 미상의 불자가 지은 작은 토굴이 화재로 전소되어 1940년 윤경화상이 중창 백운사로 불리었으며, 1942년 다시 화재로 전소된 법당을 재건하면서 이름을 경은사(慶恩寺)로 바꾸었고, 1985년 수경 주지가 법당과 삼성각을 중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제천에서 충주로 이어지는 38번 국도는 박달재를 넘는다. 박달재터널을 빠져나오면 오른쪽 산중턱에 얼핏 하얀 탑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달리는 차의 속도가 빠르다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인 크기와 거리에 있어 바쁜 걸음이라면 눈여겨보지 못할 게 틀림없다. 하지만 가파른 바위산 위에 우뚝 솟은 그 모습에 끌려 차의 방향을 틀었다면 예쁜 절 경은사와 만나는 즐거움이 기다린다. 그 길은 박달재휴양림으로 이어지는 길이기도 하다. 휴식년을 맞아(2009년 1월 1일~2010년 12월말) 운영이 중단되고 출입이 통제된 박달재휴양림이지만 경은사로 가는 걸음은 출입이 자유롭다.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면 멀리서 보이던 신기루 같던 하얀 탑이 바로 눈 앞에 있다. 쭉쭉 뻗은 소나무와 잡목이 우거진 숲은 금세 깊은 산중을 방불케 한다. 그리고 그 곳, 깎아지른 절벽 위에 자리한 경은사가 보인다. 수령 150년 이상의 소나무들과 기암괴석들에 둘러싸인 경은사의 모습은 풍경화가 따로 없다. 자잘한 들꽃이 나붓하게 엎드린, 자연석으로 만든 계단을 한 층 한 층 밟아 오르면 마침내 경은사 앞마당이다. 앞마당에 서서 둘러보는 주변 풍광 또ᄒᆞᆫ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저 멀리 산중턱으로 보이는 길이 국도 38번이고, 박달재터널 입구도 작게 보인다.
태백산맥 치악산의 가지인 구학산 기슭에 자리한 경은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 봉선사의 말사다. 사찰 뒤로 기암괴석이 울퉁불퉁한 봉우리를 이루고, 앞으로는 도덕봉 너머로 박달재 옛길이 보인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해 삼성각, 봉향각, 향적당, 범종각 등의 여러 건물이 소박하게 머리를 맞대고 있다. 또 이소에는 유형문화재 몇 점이 보관돼 눈길을 끈다. 목조문수보살좌상 및 복장유물과 강희오십년명 석감, 우암 송시열 영정과 추양정사 영정이 그 것이다. 절집 한구석에는 바위 틈새로 샘솟는 자연 암반수가 있다. 시원한 샘물로 목을 축이고 다시 한 번 둘러보는 경은사의 그 모습은 여전히 풍경화 속에 자리한 한 장면으로 펼쳐진다.
충청북도가 유형문화재 제 294호로 지정한 ‘목조문수보살좌상 및 복장유물’은 규모가 작고 조각 솜씨도 단정해 조선시대 후기 불상 양식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복장기(腹藏記)가 전해져 조성시기를 알 수 있고, 두건을 쓰고 있는 모습이 특이하다. 유형문화재 제 295호인 ‘강희오십년명 석감’은 석감의 뒷면과 측면의 명문에 의해 조성, 주인공과 연대를 알 수 있으며, 석감 자체가 희귀한 유물로 평가되기 때문에 중요 연구자료로 꼽힌다. ‘우암 송시열 영정’ 은 옥천 경현당에 보관 중이던 초상화로, 경현당은 우암 선생이 벼슬을 버리고 옥천에 내려와 세운 서당이다. 명암을 사용하지 않고 표현한 강한 눈매와 숱 많은 눈썹, 붉은 입술 등 의리의 삶으로 점철된 우암 선생의 고집스러운 성품이 잘 표현돼 있다.
● 민영복 기념비
백운초등학교 정문 왼쪽 옆 무궁화 동산 안에 이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 비석은 민영복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1948년 3월 화강암 석재로 백운초등학교 위치에 세운 것이다. 그의 본관은 여흥(驪興), 호는 퇴금(퇴금)이며, 백운리(白雲里 : 평동) 출생이다. 고종 22년(1885)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비서승(秘書丞)의 벼슬로 지내다가, 외직(外職)으로 무주(茂朱), 금산(錦山), 장성(長成) 등에서 군수로 재임중, 고종 42년(1905) 일본과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와 주민의 협조와 사비를 보태어 흥명학교(興明學校 : 지금의 백운초등학교)를 세우고 인재 양성에 온 힘을 기울였다.
● 백운암지
주지스님의 전언에 의하면 현재 주차장이 있는 자리가 옛 절터라 하며, 주차장 조성 시 많은 양의 기와편과 석재편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또 경은사 진입로 좌측에 솟아오른 봉우리 위에 예전에는 약 2m정도의 규모를 가진 전탑 1기가 서 있었다고 하나 전탑이 계속 무너져서 허물어진 후 지금의 대리석재 석탑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예전에 서 있었던 전탑의 부재들이 전하며, 당시의 사진도 볼 수 있다. 전편들의 크기는 26.0x26.0x4.0cm이며 한쪽 면에 국화문이 시문되어 있으며 황갈색, 암회색 등의 색깔을 띠고 있다.
● 이소응선생창의숭모비
춘천 출신이나, 애련리에 이거하여 이 지역을 배경으로 의병항쟁을 하였던 의병장이다. 비는 1989년 세워진 것으로 복지회관 좌측에 세워져 있다.
● 이희직 기념비
이희직은 이 고장에서 태어나서 1922년 별세했는데, 고종 때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지내고 천성이 강직하고 인덕하여 자선사업에 힘을 기울인 바, 총 가산(家産) 300석 토지를 서울 중앙중학교, 양정중학교, 휘문중학교, 등 10여개 교에 희사하여 신진 육영사업에 공헌하였다. 이러한 큰 뜻을 기리기 위하여 마을 사람들이 비를 세웠으며 오늘날 까지도 그 공을 칭송하고 있다. 현재는 제천에서 충주 간 도로 개설로 인하여 면사무소 앞으로 이전하여 보호하고 있다.
● 평동리 보호수
보호수는 느티나무다. 2003년 4월 제천시 보호수 제 71호로 지정되었다. 수령은 330년 정도 되었으며, 나무의 높이는 8m, 둘레는 6m이다.
◎평동리 이야기
● 도덕암의 유래
제천시 백운면 박달재 중허리 건너편 산허리 밑 계곡에 울창한 삼림과 기암절벽은 하나의 절경을 이룬다. 조금 올라가면 개울가에 커다란 바위가 놓여 있다. 이 바위를 ‘도덕암(道德庵)’ 또능 ‘도둑바위’라 부른다.
조선시대 이태조(태조 이성계) 때의 일이다. 제천 혐감이 새로 부임하게 됨에 청주목에서 제천으로 떠난 현감은 충주를 지나 박달재에 다다랐을 때 일가 권속을 거느린 행차는 지지부진하였다. 더구나 만삭의 부인 때문에 더욱 늦어지고 있었다. 뒤쳐진 현감의 부인 일행이 박달재에 들어섰을 때이다. 갑자기 한 떼의 도둑들이 덤벼들었다. 하인과 뒤따르던 사람들이 모두 뿔뿔이 도망치고 말았다. 겁에 질린 현감 부인도 타고 있던 가마에서 내려 산비탈을 따라 아래로 도망치다 어느 큰 바위 위에 까지 오게 되었다.
바위 밑에 자갈이 깔리고 물이 흐르고 있어 더 이상 도망갈 길이 없었다, 현감 부인은 도둑에게 잡혀 욕을 보느니 차라리 개울로 뛰어내려야겠다 생각하고 몸을 날리려는데 진통이 일어나며 그 자리에서 아기를 분만하였다. 뒤쫓아오던 도둑은 이 광경을 보고 그 자리에 선 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사내아이를 낳은 현감 부인은 숨을 거두었다. 도둑은 아기를 안아 들며 자기의 소행을 뉘우치기 시작했다. 도둑은 아기를 안은 채 어디론지 가 버렸다. 도둑은 자기의 죄를 속죄하고 그 아기를 자식삼아 잘 길렀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도둑이 악에서 벅어나 선량한 본성으로 돌아가게 한 아기가 태어난 바위를 ‘도덕암’ 또는 ‘도둑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다.
◎박달재자연휴양림
1992년 12월 29일 개장하였으며 구역면적은 170만㎡, 1일 최대 수용인원은 1,000명, 최적 인원은 700명이다. 제천시청 산림녹지과에서 관리한다. 박달재 바로 밑 수령 100~170년의 울창한 소나무와 잡목과 기암괴석, 맑고 깨끗한 계곡이 조화를 이루는 자연환경에 조성되었다. 능선과 구릉을 따라 경사가 원만한 등산로가 개설되어있고, 삼림욕을 하면서 산 정상 전망대에 오르면 백운산, 구학산과 제천시가 한눈에 보인다. 휴양림에는 숲속의 집, 황토방 산막, 산책로, 정자, 물놀이장, 테니스장, 체력단련시설, 어린이놀이터, 반달곰, 원숭이, 꽃사슴, 청공작, 백공작 등 12종류의 동물을 기르고 있는 동물사육장과 자연관찰원, 화웨인 등의 교육시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