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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기행

제천문화원 마을기행 입니다.

제천의 역사와 전통을 알아 볼 수 있는 게시판 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제천의 지명과 행정구역의 변화 지역적 특성과 산물 등을 알려드립니다.

작성일 : 22-07-26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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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양읍] 명도리[明道里]
 글쓴이 : 문화원
(조회 : 1,766)  
5. 명도리[明道里]

 명도리는 제천 시내에서 강원도 원주로 통하는 5번 국도를 따라 5km 정도 가다보면 오른편에 자리한 마을이다. 명도리의 마을 외곽은 감아간 등 여러 산으로 둘러 있고, 앞에는 비교적 평탄하며 넓은 들이 있다. 명도리는 본래 제천군 근우면 지역으로서, ‘명둔이’, ‘명도(明道)’, 또는 ‘큰명둔’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도비동을 명도리라 하고, 1920년 9월에 봉양면에 편입되었다. 1980년 4월 1일 제천시의 승격에 따라 제원군 봉양면 명도리가 되었다가, 1991년 1월 1일 제천시 봉양면이 되었다. 1995년 1월 1일 시군통합과 동시에 봉양면이 읍으로 승격하며 제천시 봉양읍 명도리가 되었다.
 명도리 앞을 관통하는 도로는 옛날 서울로 가는 관행길이었다. 명도리에는 박씨, 한씨 그리고 송씨라고 알려진 세 집이 살았다고 한다. ‘작은말’이라고 부르는 부근에 한 가구, ‘옆 구렁’이라 부르는 곳에 한 가구, 그 아래 언저리에 한 가구 이렇게 세가구가 살고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 현재와 같은 마을 모양이 형성되었다. 마을을 개촌하였다 이들 성씨 외에도 명도리에는 여러 성씨들이 각성바지를 이루면서 살고 있는데, 반남 박씨, 평해 황씨, 우봉 김씨, 경주 이씨, 전주 이씨 등이다. 대개 이들의 세거 역사가 100년을 상회하지 못한다.
 명도리는 다섯 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마을의 모든 대도시가 이루어지는 공간인 ‘큰말(본말)’과 ‘작은말’, ‘미실’, ‘주막거리’, 그리고 ‘안골(난민촌)’ 등이다. 이들 자연마을 가운데 큰말과 작은말 그리고 미실이 비교적 빨리 형성되었고, 주막거리와 안골은 늦게 형성되었다. 명도리 마을자랑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마을 명도리는 제천 용두산의 줄기인 봉화산을 뒤에 두고 예로부터 도에 밝고 아름다운 마을로 명도리(明道里)라 일러왔다. 조선시대부터 서울로 왕래하는 길목으로 제천과 원주를 관통하는 교통요지이기도 하였다. 작은 명도와 농사골로 이름난 미실(美實), 교통이 좋은 승경지 본동, 되비골, 마장벌, 매곡을 합쳐 명도리가 형성되었고, 1985년 10월 명도1리, 명도2리로 분구되어 현재에 이른다.풍수설에 의하면 뒷명산 때문에 많은 인재가 배출되어서 옛날에는 학자골이라고도 불리었다. 마을에는 수백년이 넘는 장승이 있었으나 6.25 동란 때 소실되고 현재는 느티나무의 거목만 마을을 지켜주고 있다. 본시 마을 사람들의 성품이 착하고 근면성실하며 젊은이들은 경로효친사상이 드높아서 살기 좋은 마을을 이룩하였다.

                                                1996. 9. 16. 명도리 주민 일동

◎ 명도리 지명유래

· 도비동(道斐洞) → 되비골.
· 되비골[도비동] : 명둔이 서쪽에 있는 마을. 되비라는 사람이 살았다고 함.
· 마장벌(馬場-) : 도비골 북쪽에 있는 마을. 이 곳 꼴(풀)이 좋아서 말을 놓아 먹였다 함.
· 매꼴[매곡동] : 작은 명둔이 동북쪽에 있는 마을.
· 매곡동(梅谷洞) : 매꼴.
· 미실(美實) → 작은명둔이.
· 작은명둔이 : 명둔이 동쪽에 있는 작은 마을. 미당리 옆이 되어 미실이라고도 함.

◎ 명도리 문화유산

· 명도리 고인돌
 봉양읍 명도리에 있는 이 고인돌은 중앙고속도로 문화유적 발굴조사의 일환으로 1989년 충북대학교 박물관팀이 발굴하였다. 유적의 서쪽으로 용암천이 흐르는데, 유적의 앞에 흐르는 내와 봉양리에서 만나며, 다시 장평천과 만나 주포천으로 흘러가 제천천으로 나아간다. 작은 냇가에 위치하는 구덩식 고인돌로, 덮개돌은 화강편마암으로 되어 있으며, 냇물과 나란히 자리하고 있어 물과의 관계를 짐작하게 한다. 덮개돌의 크기는 164×106×60-54cm이며, 파인 구멍이 2곳 있는데, 그 모습이 원추 모양이 아니라 원통 모양을 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제1구멍(너비 30mm, 깊이 30mm)은 덮개돌의 겉면에 수직으로 곧게 나있으며, 바닥면은 둥근 모양이다. 제2구멍(너비 30mm, 깊이 30mm)은 모양은 1구멍과 유사하나, 바닥모양은 더 둥근 모양을 하고 있다. 덮개돌의 모양은 손질한 흔적이 살펴지는데 대체적으로 거북모양을 하고 있다. 무덤방은 물흐름과 나란하게 만들었는데, 크기는 170×50×42cm로 하여 바로 펴 묻기를 하기에 알맞은 크기로 보인다. 무덤방은 덮개돌의 힘을 고루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평평하게 돌을 다듬거나 조성한 사실이 나타났고, 무덤방을 조성할 때 판자돌로 쌓아 조성한 사실은 고인돌 문화의 또 다른 조성 방식으로 보고 있다.
 덮개돌의 운반 방법에는 지렛대식, 목도식, 끌기식, 뗏목을 이용한 방법, 겨울철의 눈이나 얼음을 이용한 방법 등이 있다. 흔히 1톤의 무게를 운반하는데 16명의 노동력이 소요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 고인돌의 무게는 대락 9톤으로 추정되는데, 덮개돌은 유적에서 50m 떨어진 구릉의 위쪽에서 떼어 낸 것으로 보고 있다. 연대를 설정할 만한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는데, 이것은 지배 계급보다는 보통의 사람임을 짐작케하는 사실로 보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남한강을 끼고 발달한 중원문화의 핵은 선사문화의 한 특색으로 고인돌 사회를 밝혀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고 보고하였다. 또한 이 유적의 150m 아래쪽 되비골에서도 고인돌 1기가 찾아졌는데 과수원 소유자가 고인돌을 받들고 있다고 한다.

· 매골 서낭당
 매골 서낭당은 안매골 입구 오른편에 위치하고 있다. 물푸레나무, 참나무 등이 서낭당 숲으로 조성되어 있어 서낭당의 고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매골 서낭당은 기와지붕에 나무판자로 벽을 만들었으며, 그 앞에 금줄이 둘러 있다. 서낭당 오른쪽 옆에는 수부신이라고 해서 제단이 만들어져 있다. 내부에는 ‘성황신위(城隍神位)’라고 쓰여진 위패가 있다. 매골 마을에는 소동계가 결성되어 있어서 마을 기금으로 당고사를 지낸다.
 당고사는 매년 정월 초에 날을 받아서 지내는데, 보통 4일 안에 지내게 된다. 제관 및 축관은 생기를 봐서 선정하며, 금줄을 u서 금기를 철저하게 지낸다. 제물로는 돼지머리 · 백설기 한 시루 · 탕 · 밤 · 대추 · 곶감 등을 진설한다. 예전에는 통돼지를 잡았으며, 떡도 한 말 이상을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많이 간소화되었다. 제의의 진행은 초헌 - 독축 - 아헌 - 종헌 - 소지 - 음복의 순으로 이루어지며, 제물을 그대로 들고 나와 수부제를 지낸다.

· 미실 서낭당
 미실 서낭당은 명도 1리 4반 주민들이 모시고 있으며, 큰말로 넘어가는 길 오른편에 위치하고 있다. 슬레이트 지붕에 블록으로 벽이 되어있으며, 문은 함석으로 되어 있다. 내부에는 ‘리사지신위(里社地神位)’라고 쓰여진 위패가 두 개 있다. 서낭당 옆에는 서낭목으로 밤나무가 있다. 미실 서낭당에서의 당고하는 예전에는 정초에 날을 받아서 지냈으나, 현재는 음력 정월 3일 7시쯤 지낸다. 성황계가 조직되어 있으며, 성황계의 소속되어 있는 회원 중에서 돌아가면서 당고사를 준비하게 한다. 제물로는 돼지머리 · 백설기 한 시루 · 포 · 전 · 모 · 탕 · 밤 · 대추 · 곶감 등을 진설한다. 술은 다른 지역과는 달리 한 잔만 올린다. 미실 마을에서 모시는 신은 ‘사지신(社之神)’ 두 분인데 한 잔씩만 올린다. 따라서 제의의 진행은 강신 - 초헌 - 소지 - 음복의 순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잔을 올리고 싶은 사람은 누구라도 올릴 수 있다.

· 미실유적
 1999~2000년도 의림지 주변일대 지표조사에서 확인된 유적이다. 명도리 미실마을 동쪽으로 샘골저수지가 있는데 여기에서 북쪼으로 약 250m 밭 일대에서 토기조각들이 채집되었다. 이 곳은 봉화산에서 남쪽으로 뻗은 작은 두 능선 사이에 형성된 비교적 깊은 골짜기의 끝부분에 해당된다. 채집유물로는 토기조각, 기와조각, 기마벽조각 등이 있는데, 채집유물의 성격으로 보아 주변일대에 고분군이나 기와 가마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

· 큰말 보호수
 1997년 10월 31일 제천시 보호수 제4호로 지정된 느티나무다. 수령은 약 250년 정도 되었으며, 나무의 높이는 18.5m×3.65m이다.

· 큰말 서낭당
 큰말 서낭당은 마을로 들어서는 입구 왼편에 위치하고 있다. 느티나무 숲에 둘러싸여 있고 슬레이트 지붕에 벽은 시멘트로 되어 있으며, 문은 철로 되어있다. 큰말 서낭당에서의 당고사에는 1반, 2반, 3반, 5반 주민들이 참석한다. 음력 정원 초에 날을 받아서 지내는 데 10일 안쪽에 지낸다. 제관 및 축관은 생기를 봐서 선출한다. 몸이 깨끗한 사람은 마을주민 누구나 참석할 수 있다. 제물로는 백설기 두 시루 · 고사리 · 도라지 · 무나물 · 탕 등을 진설한다. 백설기를 두 시루 하는 이유는 마을 주민들에게 조금씩이라도 나누어주기 위해서다. 제의의 진행은 초헌 - 독축 - 아헌 - 종헌 - 소지 - 음복의 순으로 이루어ᅟᅵᆫ다. 소지는 반 별로 한 명씩 올려 주어 개개인 모두의 소지를 올린다. 음력 7월 중에 마을 대동회에서 서낭당 숲을 깎는다.

◎ 명도리 이야기

· 가마소의 유래
 명도리에서 뫼골로 가는 작은 길이 있었는데, 그 중간에 ‘가마소’라는 소(沼)가 있었다. 작은 lf을 따라 가다보면 그 중간에 벼랑이 있고, 그 아래 개울물에 소가 있었다. 하루는 혼례를 치르고 신행(新行)길 오던 신랑을 태운 말이 발을 잘못 딛어 벼랑 아래로 굴러서 신랑이 죽었다. 이에 신부가 “나 혼자 두고 살아서 뭐하냐?” 그래서 신부가 타고 있던 가마에서 나와 신랑을 따라 소에 빠져 죽었다. 그래서 ‘가마소’라 하고, 그 위에 있는 바위를 ‘가마소바위’라고 부른다.

· 명도 샘물의 유래
 명도리 마을에는 두 개의 우물이 있다. ‘명도샘물’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우물은 아랫마을에 하나, 윗마을에 하나 모두 두 개다. 오래 전 명도리는 물이 귀한 곳이었다. 그래서 물을 먼데 가서 길어다 먹었다. 하루는 어떤 대사가 동냥을 하러 와서 밥을 달라고 하였다. 마을 주민들은 밥은 주지 못하고, 곡식은 주겠다고 하였다. 대사가 “왜 그러느냐?”라고 물었다. 마을 주민들이 대답하기를 “여기는 물이 귀해서 밥을 해 먹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대사가 산의 위치를 보고 물을 뚫을 수 있는 곳을 보아, 마을 뒷산 아래에 땅(현재 윗마을 우물자리)을 파보면 물이 나올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래 파보니 맑은 샘이 치솟았다. 그 후로는 마을에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고 농사도 잘되었다고 한다.

· 어(魚)서방 전설
 명도리 입구에서 마을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마을 뒤로 주산(主山)인 용두산(龍頭山)에서 발원한 지맥이 봉양읍내 쪽으로 뻗어 명도리에 이르러 봉화(烽火)를 피웠던 봉우재(봉화재, 烽火山)와 매사냥꾼들이 매사냥을 했던 매봉산으로 흐르면서 마을을 품고 있으며, 그곳 아래에 모둠살이가 모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모양이 마치 ‘그물을 펼쳐 놓은 듯하다.’ 그래서 마을을 부르기를 ‘그물 망(網)자’와 ‘진철 둔(屯)자’를 조합하여 ‘망둔(網屯)’이라 불렀다.
 이 때에 마을에 살았던 사람들은 어(魚)씨네 들어왔다. 이들 일족이 마을에서 부유하게 살고 있었는데, 마을이 자리 잡은 곳이 이전의 관행길이다 보니 당연히 지나가는 과객들의 하룻밤신세가 잦았다. 이 집의 큰 며느리는 그렇지 않아도 집안의 대소사가 많아 힘들어 할 판국에 과객들까지 숙식 시중을 들어야 했기에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큰며느리가 손님을 치르는 것을 힘들어하는 도중에, 스님 한 분이 찾아와 시주를 부탁하는 지라, “시주는 얼마든지 줄 터이니 제발 우리 집에 손님 좀 오지 않게 해 달라.”고 큰며느리가 부탁을 하였다. 스님은 곧장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더니 산중에 있는 큰 묘 하나를 발견하고 말하기를, “그래 저 묘가 누구 묘냐?” 그랬더니 “우리 선대 묘입니다.”라고 큰며느리가 대답했다. 이에 스님에 “그 묘를 파다가 눈 복판에 서낭이 있던 자리에 묘를 쓰면 손님이 끊길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씨 집안 며느리가 시아버지와 식구들 몰래 하인들을 시켜 칠흑 같은 밤을 이용해 묘를 이장하여 암장했다.
 그 묘를 쓰고 난 후 어씨 집에 화재가 나고, 3년 만에 망했다. 그런 후에 어씨는 모두 마을을 떠났다. 어씨들이 묘를 쓴 장소는 1970년대 마을 진입로를 확 · 포장할 때 길 옆에 있었기에 불가피하게 이장해야만 했다. 마을 어린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명도리의 지형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그물 안에서 마을로 통하는 길로 고기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길목이 되는 것인데, 그곳에다 묘를 써서 막으니 어씨가 망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야기에는 스님이 “마을에 있는 연못을 메워라.”라고 해서 연못을 메운 후로 어씨 집안이 망했다고 한다. 물고기는 물이 있어야 잘 살 수 있는데 물이 없어지니 물고기가 살 곳을 잃었다는 것이다.

· 오누바위의 유래
 가마소에서 멀지않은 곳에 ‘오누바위’라 부르는 바위가 있다. 예전에 오누이가 서울로 올라가던 중 소나기가 내려 바위 밑ㅇ서 잠시 비를 피했다. 그런데 비가 그치지 않고 계속 오는지라 어쩔 수 없이 오누이가 그 바위 아래에서 하룻밤을 자고 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뒷골 절터의 유래
 뒷골에 ‘절터’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그 앞에는 스님이 염불하던 곳인 ‘염불바위’가 있고, 물을 길어 먹었던 샘이 하나 있다. 질간에 빈대가 생기면 절이 망한다고 하듯이 한 여름에 샘 주변에 가보면 빈대가 나올 정도로 질터에 빈대가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빈대를 잡으려다가 절을 태워 절이 망했다고 한다.

◎ 명도의 민속놀이 - 상여놀이
 명도리 상여놀이는 2000년이 제7회 충북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전하여 단체 우수상과 개인 대상을 수상하였다.

· 상여의 구성
 명도리에서 이용되는 상여는 두 가지 종류가 곳집에 보관되어 있다. 그 중 하나는 이전부터 사용해왔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 다시 만든 것이다. 이전부터 사용해오던 상여가 시간이 지나면서 관리가 소홀해졌고, 거듭 사용하다보니 망가진 부속품들이 많아 아예 새로운 것으로 만들었다. 이들 상여는 외관에서도 모습이 다를 뿐만 아니라, 규모면에서도 차이가 있다. 이전의 상여가 대틀을 이용한 규모가 큰 상여이면서 상여에 부속시키는 부속품들도 또한 고형의 것을 많이 갖춘 반면, 새롭게 만든 상여는 규모도 작고 그 외형이 다른 지역의 상여와 별반 차이가 없다. 새롭게 만든 상여는 충주에서 상여를 만드는 목수에게 70만원의 현금을 주고 주문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현재, 명도리에서 사용하는 상여는 ‘소틀’이다. 소틀은 20여 명이 메는 상여이다.

· 상여놀이의 연행 양상
 상여놀이는 출상전날 밤 상여를 미리 틀어 놓고 준비해 두었다가 행하는 ‘대돋음’과 이튿날 발인에 상여를 장지까지 메고 나가면서 그리고 상여를 장지까지 운반한 상여를 해체하고 봉분을 다질 때 노는 ‘회다지’, 마지막으로 행상꾼들과 상주들 특히 맏사위를 데리고 노는 ‘진사놀이’ 등의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장난들을 일컫는다.
 먼저, 대돋움은 ‘잿덜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발인 전날 저녁에 행상꾼들과 상주들이 모여서 행하는 놀이다. 그동안 장례절차를 치르느라 심신으로 고생이 많았던 상주들을 행상꾼들이 달래는 절차다. 이는 죽은이를 위한 것이 아니고,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하는 것이다.
 대돋움은 다른 지역에서는 흔히 ‘빈상여놀이’라고도 부른다. 원래 상여는 주검을 운반하는 도구이지만, 출상 전날 밤 주검을 넣은 관을 싣지 않고 빈상여로 초상집 마당을 돌면서 노는 행위이다. 이날 행상꾼들은 곳집에서 상여를 운반하고 상여틀을 메어두어 발인을 준비하고, 상주들의 슬픔을 달래는 것이다. 대돋음이라하여 초상을 치를 때 매번 하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초상집의 경제적 여유가 있어야 하고, 흉사가 아닌 호상의 경우에 대돋음을 하는 것이다. 행상꾼들이 상여를 틀어 놓은 후 맏상주부터 복인 상주들까지 한 명씩 부르면서 술과 음식을 요구하면, 상주들은 고생하는 행상꾼들을 위해 음식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수건과 담배 등을 선물한다.
 빈상여 앞에 요령을 들고 앞소리를 하는 앞소리꾼이 한 명 타고, 뒤에 또 한 명이 탄다. 그런 후 행상꾼들이 행상줄을 어깨에 메고, 마당 주변을 돌면서 상여를 운반하는 시늉을 하는 것이다. 이 때 둘째 사위나 셋째 사위가 이웃에 가까운 집안이 있으면 그곳에 가서 상여를 메기도 한다. 심할 경우에는 초상집에 돈을 받아내기 위해 빈소가 차려진 곳까지 상여를 들이미는 일도 있다. 그러다보면 상주들과 행상꾼들과의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한다.
 그렇게 밤이 깊도록 계속하는데, 행상꾼들은 자신이 찍어둔 자리에서 상여를 메고 발을 맞추어 보고 앞소리꾼과 상여소리 호흡도 맞춰본다. 이윽고 밤이 깊으면 행상꾼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이튿날 아침에 다시 초상집으로 모인다.
 발인날 아침 발인제를 지낸 후 행상꾼들이 집에서 장지로 갈 때 상여행렬을 보면, 먼저 명정이 서고, 그 뒤로 요여, 앞소리군, 상여, 상주, 참례자 등의 순으로 선다. 행상꾼들이 상여를 메고 가는 도중에는 앞소리꾼의 소리에 맞추어 행상꾼들의 발과 호흡을 맞추면서 일의 힘듦을 줄이고, 상주들의 슬픔을 달랜다. 상여를 메고 가는 동안에는 평탄한 길이 있는가 하면 비탈길이 있고 때로는 다리가 있기도 한데, 특히 다리가 있는 것은 죽어서 건너게 되는 요단강을 상징화한 것이다. 상여를 옮기는 도중 다리가 있으며, “사우 다리 놓아라.”라 하고, 비탈이 있으면 “상여가 가지를 않는다.”라고 하면서 상여를 앞으로 갔다 뒤로 뺐다 하면서 장난을 친다. 그러면 상주들은 행상꾼들 앞에 술과 음식을 내놓고, 또 담배 등의 선물로 행상꾼들을 달래기도 한다. 이렇게 하여 행상꾼들은 잠시 쉬었다 가기도 하지만 절대로 상여를 뒤로 물리는 법은 없다.
 상여를 운반할 때 부르는 상여소리는 앞소리꾼이 메기고 행상꾼들이 받는 식으로 부르는데 처음에 떠날 때, “오호 오호” 두박자로 하고, 한참 가다가 쉴 때까지는 기분이 좋아서 짝소리로 한다. “오호 오하”는 세 박자로 한다. 장지에 도착하면 세 박자로 끝내고 “와-” 하면서 상여를 내려놓는다. 명도리에서 상여소리로 ‘회심곡’을 많이 불렀다.

세상천지 만물 중에 사람 밖에 또 있는가
여보시오 시중님네 이 내 말씀 들어보소
이 세상에 나온 사람 뉘 덕으로 나왔는가
석가여래 공덕으로 아버님전 뼈를 빌고
어머님전 살을 빌어 칠성님전 명을 받고
제석님전 복을 받어 이내 일신 탄생하니
한 두 살에 철을 몰러 부모 은공 알을쏜가
이삼십을 당하여도 어엾고 애닯구나
어디 한 번 부모 은공 갚어보자
혀를 빼여 창을 대고 머리 빼어 나를 삼어 신사무니
부모 은공 갚을쏜가 부모 은공 못 다 갚어 어이 없고 애닯구나
무정세월 여주하여 원수백발 돌아오니
없는 망령 절로 난다 망령이라 흉을 보고
구석구석 웃는 모양 애닯고도 섪은기고
절통하고 통분하다 할 수 없다 할 수 없다
흥한백발 늙어간다 인간의 이공도를
뉘가 능히 막을쏜가 왕손은 기울이라
우리 인생 늙어지면 다시 젊진 못하리라
인간 백년 다 살아야 병든 날과 잠든 날과
근심걱정 다 제하면 단 사십도 못 사는 인생
어제 오늘 성턴 몸이 저녁나절 병이 들어
경사답절 가는 몸에 태산 겉은 병이 드니
부르나니 어머니요 찾는 것이 냉수로다
인삼녹용 약을 쓴들 약효렴이 있을쏘냐
판수 불러 경 읽은들 경의 덕을 입을쏘냐
부녀불러 붓을 한들 붓덕인들 있을쏘냐
재여 쌀을 쓸고 쓸어 명산대천 찾아가서
상탕에 맥을 짚고 중탕에 목욕하고
하탕에 수족 씻고 축배 한 잔 들겨 놓고
향어향반 물 갖추어 소지 한 잔 올린 후에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나님전 비나이다
칠성님전 발원하고 신장님전 공양한들
어느 성현은 알을쏘냐 가늠이나 하여보대
제일전에 진광대왕 제이전에 초광대왕
제삼전에 송대대왕 제사전에 염라대왕
제육전에 면성대왕 제칠전에 대산대왕
제팔전에 평궁대왕 제구전에 토지대왕
제십전에 전윤대왕 열시왕에 부린사자
일식사자 월식사자 열시왕에 명을 받고
한 손에 철봉들고 또 한 손에 창검들고
쇠사슬을 빗겨치고 활동같이 좁을 길로
살대같이 달려와서 닫은 문을 박차면서
내성같이 소리치며 성명 삼자 불러내어
어서 가자 바삐 가자 이렁저렁
어서 가자 바삐 가자
눼 분구라 거역해며 눼 영이라 지체할까
실낱겉은 이 내 목에 팔뚝같은 쇠사슬로
결박해여 끌어내니 혼비백산 나 죽겠네
여보시오 사자님아 노잣돈 갖고 가게
망단자여 애결한들 어느 사자 들을쏜가
애고답다 설은지고 이를 어히 하경말고
불상하다 이내 일신 인간하직 망극하다
명사십리 해당화야 꽃 진다고 서러워마라
명년 삼월 봄이 오면 너는 다시 피련마는
우리 인생 한 번 가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북망상천 찾어갈 때 어찌할꼬 심란한동
항정 없는 개재로다 언제 다시 돌아오려
이 세상을 하직하고 불쌍하다 가련하다
처자의 손을 잡고 만담설화 못 다 하여
정신차려 살펴보니 악탕관재 여느 꽃이
성고른 극진한들 죽을 목숨 살린쏜가
옛 늙은이 말 들으니 저승길이 멀다드니
오늘 내가 당해보니 대문 밖이 저승일세
친구 벗이 많다한들 어느 누가 동행할까
부사랑에 하직하고 대문 밖에 썩 나서니
적삼내어 손에 들고 혼백불로 조우나니
없느 목숨 낭자하다 일식사자 손을 잡고
월식사자 등을 밀어 붕어 같이 재촉하여
천방지방 몰아낼 때 높은 데는 낮어지고
낮은 데는 높아진다 아그약신 먹은 재물
먹고 간들 쓰고가라 사자님아 사자님아
내 말 잠깐 들어 보소 시장한테 점심하고
신발이나 고쳐진고 쉬어 가자 애절한들
들은 체도 아니하고 쇠뭉치로 등을 치며
어서 가자 바삐 가자 이런 저런 여러 날에
저승 문을 닫아드니 우두나찰 마두나찰
소리치며 달라드는 인정달을 비는구나
인정쓸 돈 한 푼 없다 담배꽁초 모은 재산
인정 한 푼 써볼쏜가 저승으로 올겨올까
의복 벗어 인정띤가 열 두 대문 들어가니
무섭기도 끝이 없고 두렵기도 측량 없다
대령하고 기다릴 때 정신차려 살펴보니
열시왕이 좌게하고 재판관이 문서 잡고
남녀 죄인 잡아들여 다짐 받고 공초할 때
어두진영 나찰 들고 전후좌우 벌어써서
직치창검 삼엄할 때 정벌기구 차려 놓고
배상후련 기다리니 엄숙하니 측량 없다
남녀 죄인 잡아들여 형벌하며 묻는 말이
이 놈들아 들어봐라 선신마라 발온하고
이 세상에 낙여와서 무슨 선진 하련는가
바른대로 아뢰어라 용방비간 번을 받아
임금님께 극간하여 나라에 충성하며
부모님께 효도해여 가업을 세워시며
배고푼 이 밥을 주어 아사구제 하였는가
헐 벗은 이 옷을 주어 굴한공덕 하였는가
좋은 밭 좋은 곳에 집을 지어 행인공덕 하였는가
깊은 물에 다리 놓어 월천공덕 하였는가
목 마룬 이 물을 주어 금수공덕 하였는가
병든 사람 약을 주어 활인공덕 하였는가
높은 산에 불당지며 중생공덕 하였는가
좋은 밭에 원두 심어 행인공덕 하였는가
부처님께 공양한들 마음닫고 선심하여
염불공덕 하였는가
어진사람 오해하고 불우형사 많이하여
탐재함이 극심하니 너의 죄목 어찌하리
씨악이 심중하니 분두억에 가두리라
착한사람 불러들여 위로하고 대접하며
몹쓸 놈들 구경하라 이 사람은 선심으로
극락으로 가을지니 이 아니 좋은쏜가
소원대로 물을 적에 소원대로 하여주마
극락으로 가련느냐 선경으로 가련느냐
장생불사 하련느냐 서왕부에 사완되여
반도소리 마련느냐 네 소원을 아뢰어라
옥제전에 주문하여 석가여래 아미타불
재도하기 이문하자 살림부어 의논하며
어서 바삐 시행하자 저런 사람 서심으로
귀회하여 가난이라 대웅전에 초대하여
다가올여 대접하며 몹쓸놈들 잡아들여
착한사람 구경하라 너 해노면 재중간직
불두옥에 가두리라 죄목을 물은 후에
온갖 형벌 하는구나 죄지경중 가리어서
차례대로 처결할 때 도산지옥 타산지옥
한방지옥 발설지옥 독자지옥 아침지옥
닥쳐지옥 분부하여 모든 죄인 처결한 후
대연을 배설하고 착한 여자 불성드려
공정하며 하는 말이 소원대로 다릴려라
선녀대저 가졌느냐 남자대저 가졌느냐
재상부인 되전느냐 재후왕비 되전느냐
부모봉양 하련느냐 네 원대로 하여주마
소원대로 다릴려라 선녀 불러 분부하여
극락으로 가게 하니 이 아니 좋을쏜가
선심공덕 아니하면 우마형상 못 면하고
부부 *ㅇㅇ* 못 면해야 조심하여 수심납고
수신제가 능히 하면 기후가민 하오리니
아무쪼록 십을시고 조덕을 아니하면
시후사가 참혹하니 바라라니 우리 형제
찾연 *사엄* 다 하여서 내생 길을 잘 닦아서
극락으로 나가세
나무아비타불 나무아비타불 나무아비타불

‘회다지소리’는 상여를 장지까지 운반한 뒤에 상여를 내려놓고, 잠시 쉬었다가 봉분을 만들 때 부르는 노래이다. 광중에 하관 한 뒤 사방으로 흙과 회를 친 다음 봉분을 쌓을 때 봉분이 튼튼하도록 하기 위해서 행상꾼들은 발을 번갈아 가면서 밟고, 연촛대를 빼어 짓누르고 박으면서 흙을 다지는 행동을 계속한다. 이때에도 앞소리꾼의 메기는 소리에 맞추어 행상꾼들은 소리를 받으면서 일을 계속하는 것이다.
 행상꾼들이 흙을 다지는 동작은 마치 춤을 추듯 한다. 흙을 다지는 동작을 할 때에는 일제히 오른발이 앞으로 나오며 두 손도 역시 앞으로 뻗어 손뼉을 친다. 덜구소리는 산과 강의 근원을 이야기 하고, 그 지맥으로 형성된 전국의 명산과 강을 거론한 다음, 마침내 지금 자리잡은 묘터도 명당이라는 것을 말한다. 상여소리는 집을 떠나 묘지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부르는 노래이지만, 회다지소리는 이제 음택인 묘지에 자리를 잡고, 터를 다지는 상황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주검의 현실 세계를 읊는 사설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에호리 달회 / 에호리 달회
여봅소 기원님네 / 에호리 달회
옥설가를 부릍터니 / 에호리 달회
일심합력 받아주소 / 에호리 달회
선천지 후천지는 / 에호리 달회
억만세계 무궁이라 / 에호리 달회
산지조종은 곤륭산 / 에호리 달회
수지조종은 황하수라 / 에호리 달회
곤륭산 일지맥에 / 에호리 달회
우리 조선 생겼으라 / 에호리 달회
에호리 달회 / 에호리 달회
팔도강산 굽어보면 / 에호리 달회
행경도{함경도} 백두산은 / 에호리 달회
압록강이 둘러 있고 / 에호리 달회
평한도{평안도} 묘향산은 / 에호리 달회
대동강이 둘러 있고 / 에호리 달회
황해도 구월산은 /에호리 달회
섬진강이 둘러 있고 / 에호리 달회
강원도라 금강산은 / 에호리 달회
세계의 명산이오 / 에호리 달회
천하의 제일이라 / 에호리 달회
경기도 삼각산은 / 에호리 달회
임진강이 둘러 있고 / 에호리 달회
충청도 계룡산은 / 에호리 달회
에호리 달회 / 에호리 달회
경상도 낙동강은 / 에호리 달회
경상도 태백산은 / 에호리 달회
낙동강이 둘러 있고 / 에호리 달회
전라도 지리산은 / 에호리 달회
충청도 계룡산은 / 에호리 달회
공주 금강 둘러 있고 / 에호리 달회
전라도 지리산은 / 에호리 달회
섬진강이 둘렀구나 / 에호리 달회
제천이라 용두산은 / 에호리 달회
장평강이 둘렀구나 / 에호리 달회
이 산수터 잡을 적에 / 에호리 달회
누구 누구 잡었던고 / 에호리 달회
도선이화 박선이가 / 에호리 달회
은도판을 손에 들고 / 에호리 달회
나침판을 앞에 놓고 / 에호리 달회
좌청룡 놓아볼까 / 에호리 달회
우청룡 놓아볼까 / 에호리 달회
앞에 주춘 노적봉은 / 에호리 달회
대대 거부 날 것이고 / 에호리 달회
뒤에 주춘 장군봉은 / 에호리 달회
대대 장군 날이로다 / 에호리 달회
옆에 주춘 늠길봉은 / 에호리 달회
대대 문장 날 것이다 / 에호리 달회
이 산수를 드린 후에 / 에호리 달회
기남자가 낳단 말가 / 에호리 달회
그 아이 상을 보니 / 에호리 달회
얼굴은 관옥이고 / 에호리 달회
신체는 두목이라 / 에호리 달회
한 살 먹어 걸음배와{배워} / 에호리 달회
두 살 먹어 말 배우니 / 에호리 달회
소진장에 구변이요 / 에호리 달회
네 다섯에 글을 배워 / 에호리 달회
칠 팔세에 통달하니 / 에호리 달회
서울 장안 만호에다 / 에호리 달회
암행어사 났단 말가 / 에호리 달회
에호리 달회 / 에호리 달회
에호리 달회 / 에호리 달회

진사놀이는 장지에서 봉분을 다 만들고 나서 평토제를 지낸 후 상주들과 행상꾼들이 돌아오면서 맏사위를 데리고 노는 놀이다. 진사놀이를 할 때 맏사위만 데리고 노는 것은 큰 딸을 데리고 갔으니 성공해서 장인 장모를 잘 모시라는 의미이다. 장사를 지낼 때에 맏사위는 굴건제복을 입는데, 머리에는 굴건과 테를 두르고, 허리에는 짚으로 엮은 요질을 두른다. 맏사위가 굴건을 입은 모습이 꼭 진사가 건을 착용한 모습이라고 한다. 반혼할 때 서너 발이 되는 새끼줄을 맏사위가 두른 요질의 군데군데를 엮고, 5~6명의 행상꾼들이 “우~우”하면서 이리저리 잡아당기면서 애를 먹인다. 그리고 올 때 담뱃대를 물린다.
 그렇게 놀다가 초상집 앞에 도달하여 여자 상주들이 마중을 나와서 곡을 하고, 집으로 들어간 후에는 사위를 외양간에 모신다. 외양간에 가서 허리에 묶은 새끼줄을 소를 묶는 곳에 소를 매듯이 기둥에 붙들어 맨다. 그런 후 집안 상주들이 “고기가 얼마고, 술이 몇 초롱인고”하면서 장난치는 사람들에게 대접한다. 장난치는 어른들을 대접하기 위함이다. 그러면 제사상에 차렸던 떡, 고기 등의 음식과 술을 내 온다. 이렇게 상을 차린 후 상주들과 진사인 사위가 행상꾼들에게 술을 한잔씩 대접하고, 또 역으로 행상꾼들이 상주들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한다. 그렇게 그날 밤을 유쾌하게 놀다가 밤이 이슥하면 행상꾼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다. 장사를 치르느라 고생한 것에 대해서 놀면서 대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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