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의 역사와 전통을 알아 볼 수 있는 게시판 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제천의 지명과 행정구역의 변화 지역적 특성과 산물 등을 알려드립니다.
작성일 : 16-07-12 13:18
[청풍면] 수름산 아래 마을 - 후산리(後山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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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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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산리(後山里)는 청풍군 수하면(水下面)에 속했던 지역으로 마을 뒤에 큰산이 있으므로 후산동(後山洞)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후산리라 하여 제천군 수하면에 편입되었다가, 1929년 10월 청풍면에 편입되었다. 마을은 청풍면의 북서쪽에 위치하였으며, 마을 뒤편으로는 해발 380m의 산들이 줄지어 사오리(査伍里)로 이어져 있고 수름산(551.2m) 아래 골짜기와 마을 앞쪽으로 들판이 펼쳐져 있다. 마을은 모두 3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졌는데, 1반은 웃말, 2반은 아랫말, 3반은 단장골로 구성되었다. 마을에 처음 입향한 성씨는 전주 이씨(李氏)이고 그 다음으로 문화 유씨(柳氏)가 마을에 들어와 살았다. 마을의 주변은 온통 산으로 둘러 쌓여있어 6·25전쟁 당시에도 인근 마을민의 은신처로 활용되었던 곳이다. 조선시대에 이후산(李後山)이라는 자가 청풍부사로 왔는데, 후산의 지명이 부사의 이름과 같다고 하여 후산의 동명(洞名)을 두산(斗山)으로 바꾸어 부르게 하다가 청풍부사직을 끝내고 돌아간 후에 '후산'이라는 명칭을 다시 사용하였다고 한다. 마을에는 문화 류씨(柳氏)가 처음 입향하였는데 약200여년(처음 입향한 유씨의 현재 거주자의 7대조임) 전이었다.
현재는 수몰 전에 있었던 마을에서 산쪽으로 약 500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수몰 전에는 60여가구-유씨 40여가구, 타성 20여가구-가 거주하였으나, 수몰이후 대부분은 타지로 떠나고 현재의 후산으로 이주한 가구수는 17가구-유씨가 16가구이고 최씨가 1가구-였는데, 지금은 11가구의 유씨만이 살고 있다. 현재 마을에서는 수몰 전 마을에서 큰돌을 가지고 와서 "후산리 재건기념비"를 세웠다. 그리고 공덕비가 2개 있는데, 하나는 진주 유씨를 기리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우계 이씨를 기리고 있다. 전자는 새로운 마을의 터를 제공한 것을 기리고, 후자는 터를 닦아준 공로를 기리는 것이다. 수몰 전 마을은 웃말과 아랫말로 구성되었다. 두 마을의 거리는 대략 200m였다. 마을 옆에는 단장골, 은장골과 논골(웃말과 아래말 사이의 우측편에 있었다.) 등이 있었다. 후산리의 사람들의 생업의 터전은 황석리와 같은 황두리들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인근지역에서 최고의 옥토로 정평이 나 있다.
"일을 하다가 호미자루가 빠져도 호미자루를 박을 돌멩이가 없을 정도로 토질이 좋았다."
후산리는 남한강변에 위치한 모든 수몰지역과 마찬가지로 밭농사에 좋은 사질토양으로 되어있어 밭 한 마지기만 있으면 생계는 물론, 자식교육비까지도 걱정 없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이다.
이곳은 전주 이씨(李氏)가 맨 처음 정착하여 마을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고 전해오는데 지금은 문화 류씨(柳氏)가 대성을 이루고 있어 1983년 현재 마을인구의 약 72%를 차지하였다.
마을의 생업환경은 인근 황석마을과 비슷해 단무와 배추가 주작물로 손꼽히고 있는데 단무는 1년에 2만 5천관을 생산하고 있다. 마을에서 생산되는 환금작물은 고추와 마늘로 전체 농사로 얻어지는 연간 가구당 소득은 2백50만∼3백만원을 차지하였다. 마을은 전란의 와중에 피난처로 유명하였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으나 동네입구에는 다래덩굴이 울창하게 덮혀 있었기 때문에 마을전체가 이 덩굴에 가려져 외부로부터의 침범을 막을 수 있었다고 전한다.
새마을 사업이 시행되기 전 이 마을에서는 청년들이 모여 '새빛'모임을 만들었다. 마을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시기인데 동네에 세워져있는 마을회관, 한지공장, 단무저림공장(1975년 건립)은 모두 청년회에서 주관하였던 마을 사업이다. 주작물을 가공해내고 있는 단무 저림공장은 그 당시 대통령하사금 1백만원을 지원 받아 건립했는데 지금은 개인이 임대해 사용하고 있다.
마을은 제천에서 16km, 충주에서는 36km지점에 각각위치하고 있어, 모든 생활권이 제천과 연결되어 있다. 1983년 현재 마을은 총 55호이고, 이중 반수인 23호가 현재의 이주마을인 덪작골 위쪽으로 이주하였다. 마을이 수몰되기 전, 마을기금 300만원은 이주민들이 각자 나누지 않고 그대로 마을기금으로 희사하였다. 마을의 입구에는 수령 150여년 이상 된 느티나무가 오랜 세월동안 마을의 지키미가 되어왔으나 수몰 당시 베어지고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