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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문화원 마을기행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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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7-12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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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산면] 부처같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 다불리(多佛里)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2,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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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산면소재지에서 북동쪽으로 2km 정도를 달리면 가파른 산등성이를 넘는다. 이 고개가 굴고개재. 한 여름에 따가운 햇살을 숨길만한 나무그늘도 좀처럼 찾기 어려운데, 주변에는 검푸르게 녹음을 더해가는 담배 잎이 무성하다. 여기에 삼거리가 있는데 왼쪽으로 내려가면 전곡리·도전리 방면이고, 오른쪽 산등성이를 따라 연결된 좁은 농노길을 따라가면 다불리(多佛里)로 이어진다.


굴고개재를 지나 좁은 마을길을 가다보면 산 아래로 수산면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온다.  
해발 440.5m의 마을산 아래 다불천(多佛川)을 따라 경사가 급한 협곡 주변으로 농가 몇 채가 옹기종기 모여있다. 이곳이 다불리(多佛里)이다.
마을은 온통 높고 낮은 산들로 에워 쌓여 있어 한낮에도 사람의 왕래가 드물다. 또한 마을은 경사가 급한 골짜기에 비좁게 자리하고 있어 마을민의 생존여건이 열악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마을입구로 들어서다 보면, 다불암(多佛庵) 표말과 함께 작은 석불이 이정표를 대신하고 있다. 이곳 다불암은 예전엔 정방사보다 더 큰절이었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점차 쇠퇴하여 결국은 작은 암자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전해진다. 마을은 원래 다불암 밑에 자리했던 작은 사하촌(寺下村)이었다.
마을은 외부와 거의 철저하게 차단되어 있고, 마을 밖에서는 마을이 어디에 자리하는지 좀처럼 알 수 없다. 예전부터 이곳은 피세벽거지로 활용될 수 있었겠으나 협소한 마을터와 경작지로 많은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은 되지 못한다.

마을은 청풍군(淸風郡) 근남면(近南面)에 속했던 지역으로 다불(多佛), 다불미 또는 다불산리(多佛山里)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다불리'(多佛里)라 하고 수산면에 편입되었다. 1984년 당시 인구가 111명 이었지만, 98년 현재 7가구 22명이 거주하고 있고 7월달에 상천리에서 이주해 온 주민이 있어 총 8가구가 거주한다.
마을에서 다불천을 따라 1km를 내려가면 남한강이 흐르고 있고, 강 건너편의 하천리로 통하는 내매(內梅)나루터가 있었다. 마을 유래는 원래 절터가 있었다고 하며 지금도 밭을 경작할 때 땅을 갈다보면 기와장이 나오곤 한다. 원대리에 살고 있던 평창 신(申)씨가 200여년전 마을로 가장 먼저 입향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구체적인 증거는 없다. 그 다음으로 연일 정씨가 마을에 입향하면서 지금의 마을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주요 경작물로는 수몰 전에는 수수·황기·콩과 벼농사를 했는데, 70∼80마지기 이상 경작지가 있었다. 마을길을 조금만 내려가면 남한강 앞에 땅이 모두 농경지 였지만 지금은 모두 수몰되어 흔적조차 찾지 못한다.
마을민들은 예전부터 줄곧 농경지를 소작하였고, 일제시대 이후부터 비로소 자작농으로 전환되었다. 1950년대 당시까지 소작료는 하루노임이 콩 한섬 정도였고, 하루갈이의 밭갈이는 600평 정도의 분량이다. 일제 시대까지는 마을의 농경지 대부분이 인근 부자들의 땅이었으므로 마을민은 영세 소작농으로 생계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마을의 토지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었던 부자는 남한강 건너편에 있는 이인로씨와 수산리에서 도가를 운영하던 표씨였다. 산 정상에 있는 마을이라 물 사정이 몹시 좋지 않은데 빗물이나 산곡을 따라 흐른는 시냇물을 모아서 생활용수로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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