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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7-11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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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면] 복사꽃 사이로 취적대가 있는 마을 - 도화리(桃花里)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2,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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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사꽃 시골길은 신선의 경지요, 단풍잎 계곡과 산은 금수산의 계곡이라' 조선시대 문신 정인지(文臣 鄭麟趾)가 충청도 관찰사로 있을 때 청풍면 도화리 취적대(吹笛台)를 보고 읊은 시이다. 이계원(李啓遠)도 '挑花洞天第一江山'이라고 새겨놓았고, 부사 오도일(吳道一)도 '吹笛台臥仙台'라고 새겨 놓았을 만큼 도화리의 경치는 장관이다.
강변의 바위군이며 강줄기를 휘어감는 듯한 산세는 절로 '桃花洞天第一山水'를 읊조리게 한다. 바위의 무리가 흡사 도열한 포졸의 얼굴 같기도 하다가 산을 찌를 듯이 솟아오른 큰바위는 기상을 뽐내는 장수 같기도 하다. 층층 기암괴석과 맑고 시원한 물이 조화를 이룬다. 취적대는 도화리를 지나 금수산쪽으로 더 올라서야 한다. 마을을 뒤에 두고 오솔길을 막 접어들면 아들바위와 딸바위가 있다. 이곳에 돌을 던져 돌이 바위에 올라오면 아들을 낳고 떨어지면 딸을 낳는다는 것이다. 지금도 이곳에는 수 십개의 돌들이 얹혀져 있다. 
 

도화리는 청풍에서 동남쪽으로 약 4㎞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마을지명은 조선시대 문인 정인지가 읊조렸듯이 복사꽃이 주변의 산수와 잘 어우러져 붙여진 이름인 듯 하다. 그러나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마을에서는 복사꽃이 자취를 감춰버려 마을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그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지금 마을민들은 마을이 입지한 지세가 풍수지리적으로 보아 복사꽃을 닮았다는 형국론에 비추어 마을이름을 도화리라 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마을사람들은 암행어사 박문수(朴文秀)가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고 믿는다. 조선시대 문신으로 영남(嶺南)암행어사 시절 탐욕한 관리들을 많이 적발·징계한 그가 후에 충주목사(忠州牧使)로 부임하기는 했지만 도화리에서 태어났다는 구체적인 역사적 증거는 없다. 그러나 마을에서는 집터까지 보존하면서 도화리가 그의 출생지라고 믿고 있는 사람이 많으며, 생가의 성역화 작업을 한창 진행하고 있다.
수몰이전(1982년 현재) 새터에 16호, 골말에 13호, 아래말에 30호, 피수골에 27호 정도가 모여 살았다. 마을에는 경주 최씨(崔氏)가 20여호로 대성(大姓)을 이루며 500년 가까이 세거해 왔다. 경주 김씨(金氏), 청풍김씨(淸風金氏) 등도 있고 그 외 이(李), 정(鄭), 전(全)씨 등도 모여 산다.
84년 충주댐 담수가 시작되면서 마을은 100여호 남짓 되었으나, 현재는 22호가 거주한다. 수몰전 5개반 아랫말, 피석골, 골말, 새터, 윗말이 있었지만, 현재는 1·2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 마을은 현재 이주촌에 자리하고 있었지만, 집을 짓기만 하면 화재가 나서 이곳을 '잿마당'이라고 부르며 수몰지역으로 이주하였다가 수몰 후 다시 현재의 자리로 되돌아왔다.
수몰이전 청풍면의 인근 마을에 비해 마을에는 논이 많은 편이었다. 전체 농경지의 50%가 논이었다. 금수산에서 흐르는 물을 이용해 농사를 지으며 한발이 심할 때는 남한강물을 끌어 올려 모내기를 하였다. 토질이 좋고 금수산의 물이 좋아 농사가 잘되었다. 밭에서는 고추와 참깨 등을 많이 재배하였으나 담배재배는 하지 않았다.
수몰전에는 상포계가 있었지만, 현재 남아있는 것은 없다. 다만, 수몰민들이 1년에 1번 모이는 친목회가 있는데 이주민들이 대부분 대도시로 이주하였기 때문에 1년에 한 번 모임을 갖고 친목을 도모한다.
마을의 생업은 충주댐 수몰 전에 논농사와 고추 등 일부 밭작물을 재배하였으나, 수몰 후에는 밭농사를 중심으로 고추, 깨, 황기, 담배 등을 재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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